[특별기획2] 사업 이행과 집행에 주안점을 둔 평가 잣대 과연 합리적인가?

관리자
발행일 2023-08-01 조회수 3887

[도시개혁 26호/여름호,재창간4호] [특별기획2 : 윤석열 정부 도시정책 1년 평가 / 도시재생]

사업 이행과 집행에 주안점을 둔 평가 잣대 과연 합리적인가?


최성진 도시개혁센터 재생분과장
treejin11@wku.ac.kr


 
요즘 인기 드라마인 낭만닥터 김사부를 보면 도시가 떠오른다. 아픈 환자를 두고 어떤 치료가 더 나은 것인지, 병원 경영의 방침을 두고 어떤 것이 더 나은 해법인지 부딪히는 주인공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시가 떠오른다. 드라마는 히어로물이어서 그나마 복잡해 보이는 갈등의 해소와 정답이 주인공으로 정해져 있어 마지막 회차까지만 인내하고 시청하면 되지만 도시는 그렇지가 않다. 도시는 히어로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 출근길 바쁘게 지하철을 타는 직장인도, 새벽녘 골목골목을 돌며 쓰레기를 비우는 환경미화원도, 달콤한 사탕 하나 물고 길을 건너는 어린아이도, 처음 우리나라에 놀러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외국인 방문객도 모두가 도시의 주인공이자, 보조연기자이자, 감독이고 작가이다. 모두가 동등하게 도시를 움직이는 주체이며, 모두가 동등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에 나에게 있어 사실 도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정해진 정답을 찾아간다는 느낌보다는 정해지지 않은 잡초 길을 같이 힘을 모아 열어간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합의와 소통의 과정은 험난하고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지만, 그것이 올바르게 길을 개척해나가는 방향이라고 학창시절 배웠고, 내 눈앞에 있는 예비 전문가들에게 지금 나는 가르치고 있다.

낡고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도시를 다시 생명력 넘치게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비단 윤석열 정부만의 고민이 아니었고 도시의 정비와 재생이라는 화두가 던져진 이후로 이 질문은 지속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재생은 사회 간접 비용과 가치, 문화와 인문에 관한 가치를 적극적으로 도시라는 문법에 끌어들여 왔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도시재생은 어쩌면 언젠가부터 단추를 잘못 채워왔는지 모른다. 재생이라는 인문법적 글자에 뉴딜이라는 경제 철학을 묶으면서부터 이미 경제적 성과에 대한 매서운 비판은 예견됐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수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그 가운데서도 효율과 생산, 토지 가치의 상승을 중시하는 도시 개발과 정비의 문법과는 다른 재생만의 문법이 조금씩 성장했다. 비록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없던 지역도 있었고, 많은 프로그램 운영의 한계도 있었음을 인정하여야 하겠지만 지역마다 많은 중간조직이 생겨났고, 투표 시즌 외에는 ‘지나가는 행인 1’로 취급받던 주민이 도시를 만드는 하나의 주체로 법적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국토정보로 공유되기 힘든 지역에 거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지역의 문화적, 인적자원에 관한 정보가 방대하게 수집되었고, 돈 없고 못 사는 지역도 활발한 논의의 중심이 될 수 있었으며, 모르는 사람들과의 공동체 활동을 현대 도시에서 실현하고 이웃과 관계 맺기를 해보았다. 이 모든 것은 박근혜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에 이르는 시간 동안 우리가 함께 힘들게 이룩한 성과이다. 그런데 이 모든 성과가 윤석열 정부에서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힘들게 구축한 중간조직은 문을 닫고 다시 모으기 힘든 지역의 고유한 정보는 사라지거나 흩어지고 있다. 도시의 문법은 다시 경제적 번영과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이던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칠팔십년대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기에 잘 사는 것은 중요했다. 잘 산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벌고, 직업적 직위가 높은 곳에 이르는 것이었고, 그게 행복한 삶의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경제적으로 부족했던 많은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이 잘사는 삶을 만들기 위해 장남에게 ‘올인’했다. 장남이 잘되면 커서 형제를 잘 돌볼 것이다. 형, 오빠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다. 라는 신념으로 장남은 좋은 학원에 다니고 과외를 받았고 도시락 반찬에 달걀이 두 개씩 올라갔다. 그 결과, 장남은 그 잘사는 부류에 들어갔을지 모르지만 많은 둘째, 셋째는 여전히 그러지 못하였다. 슬프게도 둘째, 셋째를 자기만큼 잘사는 부류에 나중에라도 올려줄 수 있도록 ‘후속 투자’를 해주는 장남은 손에 꼽아야 할 정도였다. 우리의 과거 도시사는 장남 올인이었다. 그 결과, 지역 불균형이 생기고 지역 간 갈등이 생겨났으며, 시간이 갈수록 이 간극은 점점 커져 왔다. 정비도 물론 이런 문제의 해소를 목표하지만, 재생은 불균형적인 사회구조를 동시에 해소하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처방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처방의 효과는 긴 시간을 요구한다. 미국, 영국, 일본 등 도시재생을 선도한 많은 국가에서 도시재생사업을 30년 40년간 지속하는 건 이러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도시재생은 이제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는데 새로운 정부는 건설적인 논의와 비판, 과거로부터의 학습을 통한 진보를 거부하고 과거로 회귀하였다. 인구감소로 지방 소멸의 위기에 봉착한 이때 소위 잘 나가거나 잘 나갈 것 같은 지역만을 뽑아서 성과 위주의 도시 정비를 재생의 문법에 도입하겠다는 의도를 새로운 도시재생사업 내용에 적시하였고, 그 성과의 과실은 다시 ‘잘난 장남’에게 돌아가는 구조로 사업 운용 체계를 전환하였다.

최근 그동안의 도시재생을 작심한 듯 비판하는 기사를 많이 본다. 그리고 그 기사들의 단골 메뉴는 사용되지 않는 주민 공동이용시설을 보여주면서 예산 낭비라고 지적하고 그것을 부각하고, 재생이 해준 게 없다며 다시 재개발 하자는 주민의 목소리를 실으며 땅과 집을 투자의 대상으로 몰아간다. 분명 부족한 곳이 있을 것이고 투자를 목표로 하는 주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도시재생 지역만 해도 여전히 잘 기능하는 공동이용시설이 여럿 있고 재개발로 땅값이나 집값이 무지막지하게 뛰는 일은 없었지만, 가스관이 없었는데 가스관이 생겨 편해지고, 지저분하게 버려져서 벌레 나오고 불량 청소년들이 나올 것 같던 빈집 대신에 텃밭과 놀이터, 주차장이 생겨 좋은 주민도 있고, 난생처음 장사를 해보면서 힘들지만 소소하게 돈도 벌어 좋은 주민도 있으며, 재생사업으로 변화된 골목길이 예쁘게 단장하고, 새로운 청년 가게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찾는 동네도 상당수다. 게다가 많은 언론과 현 정부가 비판하는 문제들은 그 원인이 과거의 도시재생사업의 문제에만 있다기 보다는 그동안 진행된 재생사업의 지속성을 담보하지 않는 사업 내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한 것들이 많다. 지금 윤석열 정부를 지지하고, 소위 잘 사는 사람들의 투자를 자극하길 원하는 언론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그런 것만 대중에게 보여주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든다. 만일 그렇다면 이건 정말 대단한 기만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재생사업 참여 주민 전체의 의견을 들은 보고나 연구가 진행된 적 없으며, 그동안의 도시재생사업의 올바른 평가를 위한 다양한 관점의 논의가 깊이 있게 이루어진 적도 없다. 게다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도시재생사업 구역 내에서 도시재생사업에 참여한 주민은 사업 내 전체 인구수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이어서 도시재생사업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주민은 인구대비 숫자로 보면 매우 적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도시재생사업 설명회에 와서 아파트 짓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주민 또는 대규모의 토지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대하고 왔다가 돌아가는 토지주, 건물주는 도시재생사업 시작부터 비판적이었다. 이는 도시재생의 성과에 대한 비판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물론 재생도 결국엔 정비의 한 수법이기 때문에 윤석열 정부의 재개발, 정비를 골자로 하는 재생사업은 그 자체로는 정부의 정책적 추구 방향에 따라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책 방향이다. 하지만 법도 시대의 철학을 담아야 한다. 도시 개발의 역사에서 합리적 대안을 찾으려는 방법은 20세기 초 소위 엘리트로 불리는 전문가 중심에서 20세기 중반 다양한 시민과 관계자의 참여를 통해 이뤄지는 것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이 소위 주민참여로 불리는 커뮤니티 개발 수법으로 우리나라에 정착되었다. 이 과정은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고 관계의 구조에 초점을 둔 포스트모더니즘과 민주화의 발전과도 궤를 같이한다. 이런 관점에서 현 정부의 재생사업은 수십 년간,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의 마을 만들기 운동 이후 20년 동안 발전시켜왔고 아직도 갈 길이 먼, 도시에서의 민주화 가치를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시 개발에 있어 시민사회의 참여와 지역성 회복 같은 사회적 관계의 가치 회복보다는 건설사, 시행사, 금융사를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와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성과에 치중하고 있으며 이는 도시를 사람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부동산으로서 투기의 장으로 내모는 시대 역행적 사고라고 생각한다. 도시재생은 그 근간에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균형적인 발전을 목표하고 있는데 이런 부동산적 가치 중심의 재생 접근은 현실적으로 대도시 중심의, 거점 공간과 시설 중심의 사업에 치중되므로 크고 작은 다양한 조건을 가진 지역들의 균형 있는 발전이라는 우리나라 국토계획의 대전제와도 맞지 않는다.

지난 2022년 7월, 새로운 사업 체계와 정비 방향, 조직 운영안을 담은 윤석열 정부의 도시재생사업이 발표되었고 12월 말 26개의 신규사업대상지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2023년 5월에는 2016년부터 2021년 사이에 선정된 도시재생사업 대상지의 22년도 사업 추진실적에 대한 평가 결과가 공표되었다. 평가 결과가 양호-초록(66곳), 보통-노랑(163곳), 미흡-빨강(64곳)으로 분류되어서 현장에서는 소위 ‘신호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업 이행과 집행에 주안점을 둔 평가 결과에 대해 이것이 도시재생사업을 평가하는 잣대로서 합리적인가에 대해 벌써 말이 많다. 올바른 평가는 새로운 정책 대안 개발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 그리고 사업성 위주의 평가는 결국 새로운 정책 운용 과정에서 창의와 도전보다는 예산 실행에 초점을 둔 안정성을 지향하면서 지역 다양성을 상실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비판은 윤석열 정부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부분이다. 새로운 정부의 정책이 지난 1년간 어떠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과거 정부 추진 사업에 대한 새 정부의 비판의식과 개선 방향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 실행 여부를 추적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윤석열 정부는 과거 정부의 도시재생사업을 과도한 예산 낭비가 이루어진 지역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고 재생 이전 행해졌던 개발과 정비에 다시 초점을 두고 사업을 통한 수익이 발생하는 사업 구조를 지향하고 선정 조건부터 소위 ‘사업성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그 결과, 22년 말 새로운 정부에서 처음으로 선정된 도시재생사업 구역은 경쟁력 있는 특화 거점 공간을 주축으로 하는 경제적 성과 지향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제야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아직 윤석열 정부의 도시재생사업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이를지도 모른다. 과연, 새로운 정부에서 추구했던 사업성이 확보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업적 이득이 도시재생사업이 추구하는 지역의 균형 발전과 시민 참여를 근간으로 하는 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도시 개발에 얼마나,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비판적인 시야에서 꾸준한 관찰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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